TV에 방영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참 재미있게 본다. 특히 사자 이야기가 나올 때는 아주 흥미가 있다.
철저한 야생의 세계에서는 “백수(百獸)의 왕” 이라고 불리 우는 사자도 그날그날 사냥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새로운 먹이 감에 대한 개척이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 “백수(白手)의 왕” 이 존재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야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생은 늘 전쟁터이다. 그래서 야생의 사자들은 날마다 강해지며 사냥기술도 숙련되어 진다.
그러나 숙련된 사자도 사냥에 실패할 때가 있다.
밤새 사냥에 실패한 사자는 먹임 감을 만났을 때, 마지막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한다.
그 소리에 놀란 먹임 감은 옴짝 달싹도 못하고 경직되어 먹잇감이 된다.
이것이 사자의 굶주림의 포효라고 한다. 강력한 헝그리 정신이다.
그러나 반면에 동물원에 있는 사자는 어떠한가? 이러한 굶주림의 포효가 없다.
시간이 되면 알아서 사람들이 먹이를 준다. 사냥감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먹이 감에 대한 개척이 필요 없다.
고기를 먹지만 죽은 고기를 먹는다. 때문에 발톱을 갈 필요도 없으며 영역을 지켜내기 위한
목숨 건 싸움을 하지도 않는다.
야성은 점점 더 사라지고 결국 길들여지는 사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사자들을 야생에 데려다 놓으면 굶어 죽기 딱 좋다.
말 그대로 “무늬만 사자” 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백수(百獸)의 왕”이 아니라 “백수(白手)의 왕”이 되어 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무뎌짐이다.
그저 던져지는 먹이에 안주하여 진짜 사자가 아니라 사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7:22에는 천국에 갈수 없는 자들이 나온다. 그들이 바로 선지자 노릇을 한 자들이다.
우리는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 노릇이 아니라 성도가 되어야 한다.
교사 노릇이 아니라 교사가 되어야 한다. 장로노릇이 아니라 장로, 권사노릇이 아니라 권사, 집사노릇이 아니라 집사가 되어야 한다.
노릇은 흉내에 불과한 것이다. 관리 안 해도 적당히 나와 주는 주일학교 학생이나
성도에 안주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늘 해온 일이라고 습관처럼 일하지 말라! 그것이 무뎌진 자의 특징이다.
그것은 죽은 고기를 먹는 동물원 사자와 같다.
그래서 숙련됨과 무뎌짐은 완전히 다르다.
숙련된 성도는 늘 같은 예배를 드리지만 늘 새로운 예배를 올려 드린다.
늘 같은 사역을 감당하지만 늘 새로운 사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그러한 성도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케 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며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개척정신이며 숙련된 신앙인 것이다.
개척정신은 개척교회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말로 헝그리 정신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수적인 부흥과 관계없이 늘 개척정신이 살아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한다.
기억하라! 우리는 동물원에 있는 사자가 아니다.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는 영적 야생에 있는 자들이다.
그곳은 가만히 있다고 먹이가 굴러오는 곳이 아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개척해야 하는 곳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에 다시금 우리교회는 돌아보기를 원한다.
우리는 참된 “성도”인가? “성도노릇”을 하고 있는 자인가?
“백수(百獸)의 왕” 인가? “백수(白手)의 왕” 인가? “숙련된 자”인가? “무뎌진 자”인가?